피아노 건반을 배경으로 독일 음악가 로베르트 슈만의 악보 위에 놓인 노란 단풍잎. ／ 셔터스톡













아직도 재작년 한 공연장으로 향하던 날만 떠올리면 심장이 조여오며 호흡이 가빠진다. 오케스트라와 협연이 예정돼 있었고, 그날은 연주 전 전체 리허설이 있는 날이었다. 평 황금성릴게임 소보다 넉넉하게 시간을 계산해 나섰지만 갑작스럽게 폭우가 쏟아지고, 앞에는 교통사고까지 났다. 내가 몰던 차도 접촉 사고가 나면서 도착 예정 시간은 기약 없이 늦어지고 있었다. 큰 사고는 아니었기에 금세 수습할 수 있었지만, 앞의 대형 추돌 사고로 도로는 완전히 마비됐다. 내비게이션 앱은 여러 우회로를 제시했지만, 방향을 바꿀 때마다 길은 더 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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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와 80명의 단원이 무대에서 리허설을 기다리고 있을 시간이 다가왔다. 무대 위 덩그러니 놓인 피아노를 떠올리자, 심장은 미친 듯이 뛰었고, 머리는 하얘졌다. 순간 나를 원망했고, 세상까지 원망했다. 공연장 측에서 걸려 오는 전화를 받으며 “금방 도착합니다, 10분 뒤에 도착합니다, 아니 15 바다신게임 분 뒤에 도착합니다”라고 목을 쥐어짜며 말했지만, 길은 여전히 움직이지 않았다. 차는 멈춰 있었지만 내 안의 시간은 역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그날 내가 느낀 ‘급함’은 단순히 이동 속도가 아니라, 마음이 앞질러 달려가는 감정의 속도였다.


결국 리허설엔 한참 늦었다. 단원에게 고개 숙여 사과했 야마토통기계 다. 수십 명이 함께 움직이는 오케스트라 일정에서 개인 변명은 변명이 되지 않는다. 다행히 연주는 무사히 끝났지만, 그날의 긴장이 너무도 과했는지 며칠 동안 몸살에 시달렸다.





그날의 기억이 떠오를 때마다 나는 독일 음악가 로베르 바다신2릴게임 트 슈만(1810~56년)의 피아노 소나타 제2번 1악장을 함께 떠올린다. 도입부에는 독일어로 ‘So rasch wie moglich(가능한 한 급하게)’라는 지시어가 적혀 있다. 곡 전체에는 숨이 막힐 듯한 조급함이 흐른다. 짧은 탄식이 쉼 없이 터지며, 숨이 턱끝까지 차오른 순간을 묘사하는 듯하다.


오스트리아 유학 시절, 나는 이 곡을 수업 중 교수에게 들려준 적이 있다. 교수는 내 연주를 들으며 이렇게 말했다.





“자네가 무작정 빨리 치니까 오히려 단순하게 들리네. 급하다는 건 빠르다는 것과 달라.” 그리고 이런 말을 덧붙였다.


“박자를 조금 늦춰 보게. 악보의 모든 음이 머릿속에서 분주하게 살아 움직이는 순간, 진짜 ‘급함’이 느껴진다네.”





그 조언을 따라 박자를 조금 늦추자, 오히려 연주는 더 어려워졌다. 느려진 속도 때문에 이전에 무심코 지나친 음이 모두 드러났고, 손끝과 귀, 머리가 동시에 바삐 반응해야 했다. 그때 나는 급함이란 단순한 속도가 아니라 인지 밀도와 감정 압박에서 비롯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빠름은 급함이 아니다


리허설에 늦었던 날도 마찬가지였다. 차 안에 갇혀 꼼짝 못 한 채, 나는 수없이 많은 경우의 수를 머릿속으로 계산했다. 다른 길로 돌아갈 수 있을까, 지금이라도 조금 더 늦는다고 연락해야 할까. 몸은 움직이지 못하는데 마음은 모든 방향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내 안의 초침이 폭주하듯, 심장 박동은 감당하기 힘들 만큼 빨라졌다.





‘빠르다’고 해서 반드시 ‘급하다’는 것은 아니다. 음악에서 빠르게 잘 연주하려면 한 음 한 음을 신경 쓰기보다 수많은 음을 하나의 호흡으로 묶어 단순화해야 한다. 그래야 신체 효율이 높아진다. 빠름은 치밀한 계산과 구조적 통제의 산물이다. 반면 급함은 감정 흐름이 폭발하는 상태다.





육상 선수를 떠올려보면, 이 차이는 분명하다. 그들은 기록 단축을 위해 루틴(일상적 훈련 패턴)을 만들고, 페이스(속도)를 계산하며, 리듬을 통제한다. 빠름은 이성적 조율의 결과다. 그러나 여기에 ‘조급함’이 끼어드는 순간, 빠름의 구조는 무너진다. 그래서 많은 선수가 인터뷰에서 ‘멘털 관리를 가장 중요한 훈련’이라고 말한다.





음악도 다르지 않다. 빠름에 도달하려면, 자신이 가진 테크닉(기술적 능력)의 한계를 알고, 그것을 효율적으로 극복할 방법을 연구해야 한다. 하지만 급함을 표현하려면, 신체의 움직임보다 심장을 조이고 불안을 만들어내는 감정의 리듬을 다룰 수 있어야 한다.


이런 차이는 심리학적으로도 설명된다. 미국의 인지심리학자 레이철 서스먼(Rachel F. Sussman)과 로버트 세클러(Robert Sekuler)는 2022년 ‘서두름의 심리: 시간 압박이 인지 통제와 스트레스에 미치는 영향’이라는 제목의 논문에서 시간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상태에서 뇌는 인지와 통제 기능이 약화한다고 주장했다. 급함은 심장을 조이고 호흡을 빠르게 하지만, 동시에 빠름을 표현할 때 필요한 이성적 사고를 희미하게 한다. 즉, 급함은 불안의 산물이며, 감정이 이성을 압도하는 상태다. 반면 빠름은 이성의 구조 위에서만 만들어진다.


한편, 사람이 조직 내에서 시간을 인식하고 행동을 조정하는 방식을 탐구하는 조직 행동 연구(organization behavior studies)에서도 흥미로운 구분이 있다.





미국의 경영학자 애비 십(Abbie J. Shipp)과 캐런 잰슨(Karen J. Jansen)은 2021년 발표한 논문인 ‘또 하나의 시간: 조직 내 주관적 시간 경험에 대한 고찰’에서 인간의 시간 경험을 객관적 시간(시계의 시간)과 주관적 시간(내가 느끼는 시간)으로 나눈다. 후자는 우리가 본질적으로 ‘급하다’ 혹은 ‘여유 있다’ 를 느끼는 근거가 된다. 실제 속도가 느려도 조급하게 느껴질 수 있고, 반대로 현실 속도가 빨라도 마음이 평온하면 급하지 않다는주장이다. 결국 빠름은 물리적 속도이고, 급함은 심리적 속도다. 즉, 빠름은 행동의 시간이고 급함은 마음의 시간이다.


음악에서도 이 차이는 명확하다. 너무 빠르게 건반을 치면 곡의 긴장감보다 연주자의 기량이 앞서게 된다. 그럴 때 음악은 작곡가 내면보다 연주자의 기술이 중심이 되고, 진짜 급함의 정서는 사라진다.





슈만이 쓴 독일어 ‘Rasch(급하게)’와 비슷한 의미로 ‘Presto agitato(매우 빠르고 동요하듯이)’ ‘Allegro agitato(빠르고 동요하듯이)’ 같은 이탈리아어 지시어가 있다. 예를 들어 프레데리크 쇼팽(1810~49년) 발라드 제2번의 ‘Presto con fuoco(매우 빠르고 격정적으로)’의 ‘Agitato(동요하듯이)’ 부분을 떠올릴 수 있다. 짧은 호흡이 바삐 이어지며 비극으로 치닫는다. 프란츠 리스트(1811~86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2악장의 ‘Allegro agitato assai(매우 빠르고 격렬하게)’에서도 오케스트라와 피아노는 짧은 호흡으로 쉼 없이 대화를 주고받으며 극도의 심리적 긴장을 형성한다. 급함이 늘 부정적인 감정으로 귀결되는 것은 아니다. 종종 삶을 앞으로 밀어주는 내면의 에너지가 되기도 한다. 요하네스 브람스(1833~97년)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 4악장 ‘Presto non troppo ed agita-to(너무 빠르지 않게 그러나 흥분해서)’의 열정적인 코다처럼 급하게 뛰는 심장은 우리를 눈부신 빛이 발하는 인생의 아름다운 장으로 달려가게 하는 추진력이 될 수 있다.





기술의 언어, 감정의 언어






안종도 - 연세대 피아노과 교수，독일 함부르크 국립음대연주학 박사，전 함부르크국립음대 기악과 강사




이런 급함과 빠름의 차이를 나는 오늘도 대학 연구실 피아노 앞에 앉아 학생들과 이야기한다. 대부분 학생은 악보에 급함을 뜻하는 지시어가 등장하면, 그보다 먼저 빠름을 떠올린다. 흥미로운 점은 오히려 작곡가가 ‘빨리’라는 지시어를 적은 부분에서 학생들은 빨리 쳐야 한다는 심리적 압박을 느끼며 오히려 급함의 감정을 더 강하게 표현한다는 것이다. 참 청개구리 같은 심리다.




이 급함과 빠름의 혼용은 음악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우리 삶 전반에서도 쉽게 발견된다. 한국 사회는 세계적으로 ‘빨리빨리’로 유명하다. 택배 회사 전화번호가 ‘8282(빨리빨리)’로 끝나는 경우가 흔할 정도로, 우리는 ‘빠름’을 미덕으로 여긴다. 물론 빠름 덕분에 생활이 편리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 속도가 주는 편리함 이면에는 마음을 점점 더 조급하게 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깔려 있다고 느껴진다. 각종 통계가 보여주듯, 과속· 산업재해·우울증과 불안 장애 증가는 단순한 속도의 문제가 아니라 끊임없이 ‘급한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회의 그림자다.


어쩌면 우리 문제는 ‘행동의 빠름’보다 ‘마음의 급함’에 있는 것 같다. 우리는 효율과 경쟁의 이름 아래에서 어느 순간 빠름을 급함으로 착각해 버린 것 아닐까?





삶이 악보와 같다면, 그 한가운데 이렇게 적고 싶다. ‘Adagio(아다지오·조금 느리게)’. 그것이 어렵다면 슈만의 말처럼 ‘Rasch, aber nicht sehr(급하되 너무 지나치지는 않게)’.





빠름과 급함은 구분돼야 한다. 빠름은 기술 언어이고, 급함은 감정 언어다. 그리고 그 급함의 감정이 불안만이 아닌 브람스의 피아노 소나타 제1번의 결말처럼 우리를 눈부신 인생의 의미로 데리고 가길 소망해 본다.